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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 뉴스

인류의 이동: 동쪽을 향한 여정

by 한국고고학콘텐츠연구원(플라스캠프) 2012. 5. 7.



74,000년 전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 섬의 토바 (Toba)라고 불리는 화산은 지금까지 가장 대규모의 화산폭발이 일어났다. 며칠 뒤에 화산재가 쏟아졌으며 며칠 뒤에 내린 비로 인해서 화산재는 몇 미터 두께로 계곡에 쌓이게 되었다. 결국 이 곳에 존재했던 호수와 습지는 사라졌으며 그 뒤에 기후가 더 건조해지고 온도는 낮아졌다. 토바는 동물의 서식지를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다 (Oppenheimer, C. 2011). 이러한 대혼란은 일종의 증인이 되었다. 고고학자들은 이 화산재층을 파들어갔으며 화산폭발 이전에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다는 증거를 알 수 있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이들이 우리와 같은 현생인류였을까? 아니면 이미 멸종해버린 다른 인간의 친척이었을까?

오늘날 주레루 계곡 (Jurreru Valley)의 두꺼운 화산재층은 지질학적 기록을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고고학자들은 이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는 논쟁을 하고 있다: 언제 그리고 어떻게 현생인류가 아프리카를 떠나 지구상 가장 넓은 땅인 아시아를 식민지로 만들었는가? 이것은 인간의 가장 위대한 최초의 팽창이었으며 약 12,000 킬로미터를 이동하여 약 50,000년 전까지 호주에 도달하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나 일찍 최초의 선구자들이 이동을 시작했는가는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어떤 경로를 따르게 되었으며 어떤 도구를 가지고 이동했는가?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왜 이들은 이동을 시작하게 되었는가의 문제이다. 이들은 좀더 좋은 기후에 유혹되어 광야로 이동하게 되었는가? 아니면 기술과 문화의 혁명으로 인해 움직이게 되었는가?

고고학자들의 논의에 의하면 이 논쟁은 단순한 문제로 모아지고 있다: 토바화산 분출 이전 또는 토바화산 폭발 이후에 이동이 시작되었는가? 이 논쟁의 한 끝에는 캠브리지 대학의 폴 멜라스 (Paul Mellars)가 있으며 그는 현생인류는 토바화산이 분출 이후인 60,000년 전에 처음으로 아프리카를 떠났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활과 화살을 포함한 새로운 기술을 가지고 현생인류들은 아라비아반도와 인도 및 남동부 아시아의 해안을 따라 움직여 도달했을 것이다. 현재 아시아인에 대한 유전적 분석에서 늦게 일어난 빠른 식민화 현상은 멜라스의 확신을 강화시키고 있다. 그는 “나는 내가 옳다는 확신이 강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확산
멜라스의 반대편에는 옥스퍼드 대학의 마이클 페트라글리아 (Michael Petraglia)가 있다. 인간이 아시아에 확산된 시기는 적어도 74,000년 전이며 가장 이르게 이동한 시기는 125,000년 전으로 토바 화산분출 이전으로 간빙기 시기에 습하고 따뜻한 시기에 초기 인류가 만든 것과 같은 간단한 도구를 가지고 이동했을 것이다. 그는 당시 현생인류들은 해안가를 따라 이동하기 보다는 강과 계곡 및 호수가를 따라 움직였으며 기후에 따라서 아시아에 대한 식민화라기 보다는 좀더 야생의 삶에 가까웠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100,000년 전에 현생인류의 출현을 증명하는 발견이 이루어졌다. 그는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좀더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논쟁에서 페트라글리아는 멜라스의 입장을 “고고학적으로 근거가 없다”고 비판했다. 또한 멜라스는 “토바이전의 모델을 파괴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의 열정은 결정적인 증거는 없지만 최초의 위대한 인간의 이동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에 의해 더욱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많은 다른 고고학자들을 런던의 자연사 박물관 (Natural History Museum)의 크리스 스트링거 (Chris Stringer)와 같이 연구자들이 좀더 많은 데이터를 발굴할 때까지 입장을 유보하고 기다려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고 있다. 이러한 기다림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고고학자들은 바쁘게 유물발굴시도를 하고 있으며 심지어 이번 논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최초의 현생 아시아인의 화석을 발견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해안가의 고속도로
대부분 아시아는 “선사시대에는 텅빈 공간이었다”고 페트라글리아는 말했다. 산재해 있는 화석은 고대의 인류인 호모 에렉투스, 즉 네안데르탈인의 기록이며 최근에는 현생인류가 이동해오기 전에 아시아 대륙을 차지하고 있었던 데니소바인 (Denisovan)의 기록이었다. 하지만 유물은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확신할 수 있는 화석기록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연구자들은 대부분 고대인의 이야기를 재구성할 수 있는 사람들의 DNA에 의존하고 있다. 유전학자들은 대부분 아시아에 거쳐 미토콘드리아 DNA (mitochondrial DNA, mtDNA ? 모계를 통해 유전되는 DNA)를 조사하여 초기 인간 정착자들의 후손들이라고 생각되는 고립된 원주민들에 집중하고 있다. 이들은 구분되는 mtDNA 변이 체 또는 일배체형 (haplotype)을 발견했으며 이것을 비교해서 아프리카에서 탈출해온 사람들의 가계도를 만들고 있다. 그 뿌리와 가지에 대한 시기를 알아보기 위해서 연구자들은 분자시계의 돌연변이 비율을 추정했다.

이 가계도의 뿌리는 인간들이 아프리카를 떠나기 전에 기원하던 L3라 불리는 일배체형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유전적 흔적은 많은 아프리카인과 다른 비아프리카인에게서 나타난다. 최근 L3에 대한 분자시계의 시기는 대략 60,000년에서 70,000년 전의 일로 인류는 아프리카를 토바화산이 분출한 후 수 천년 후에 떠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Soares, P. et al. 2012). 그 다음으로 오래된 세 개의 일배체형 (아프리카 외부의 L3의 직접적인 후손)은 60,000년에서 65,000년 전 사이의 것이다. 이 세 가지 일배체형은 유전적 변이체가 다중적으로 발생했으며 아라비아에서 발리까지 흩어져 있다. 옥스퍼드 대학의 유전학자인 스티븐 오펜하이머 (Stephen Oppenheimer)는 “이렇게 발생한 것을 통해서 사람들은 새로운 돌연변이가 일어나기 전에 매우 빠르게 이동한 것이다”고 말했다.

빠른 이동을 위한 가장 가능한 경로는 인도양 해안가를 따라 이동하는 것으로 수천 킬로미터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필요 없이 이동할 수 있는 것이다. 2000년대 중반까지 대부분 연구자들은 이 ‘해안가 고속도로’이론을 받아들였다. 그 이유는 토바화산 이후 이동시나리오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뒤에 mtDNT와 남성 Y염색체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아프리카로부터의 탈출은 좀더 최근에 일어났을 것이며 그 시기는 60,000년 전에 일이다. 그리고 학술지 ‘사이언스’지에 발표된 영향력 있던 리뷰에서 멜라스는 아시아와 호주의 희귀한 고고학적 기록이 빠른 토바화산 이후 이동의 유전적 증거를 지원할 뿐 아니라 문화적인 발전이 이러한 이동을 가능케 했는가를 주장하고 있다 (Mellars, P. 2006).
하지만 이 고대의 해안가를 따라 이동한 사람들의 흔적이나 정착지에 대한 증거를 찾을 수 없다. 멜라스에 의하면 이것은 놀랄만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빙하기 이후 해수면의 상승으로 인해서 해안선이 바다에 잠겼기 때문이다. 그는 “가장 오래된 자취는 지금은 바닷속에 들어가 있으며 20 킬로미터 이상의 해안지역이 사라졌을 것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륙지역에서 중요한 실마리를 찾고 있다. 인도와 스리랑카의 주레루 계곡과 다른 지역에서 출토된 가장 오래된 유물은 간단한 뾰쪽한 석기, 긁는 도구 그리고 석핵 (cores)이었다. 이들 석기들은 모두 현생인류가 아닌 고대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졌을 수 있다. 토바 화산분출 이후에 발견된 유물은 좀더 정교한 유물로 작고 곱게 만들어낸 미세석질 칼날로 화살촉과 뼈를 뾰족하게 만든 창과 구슬 그리고 타조의 알껍질로 만든 장식물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상의 변화는 ‘아주 짧은 기간에 일어났다’고 멜라스는 주장했다.
이것은 현생인류가 유럽에 도달하여 좀더 정교한 도구와 장신구를 가지고 들어와 당시 유럽에 살고 있었던 네안데르탈인들의 정교하지 않은 도구를 무색하게 만든 45,000년 전에 일어난 사건과 유사하다고 주장했다. 만일 유럽의 거대한 문화적으로 활짝 융성한 활동이 현생인류의 도착과 함께 시작되었다면 왜 아시아는 다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멜라스는 이것은 65,000년에서 50,000년 전에 남아프리카와 동부 아프리카에서 꽃핀 하우슨스 푸어트 (Howiesons Poort)라고 불리는 문화에서 기원한 기술을 가지고 이동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 정교한 기술이 현생인류가 아프리카를 떠나게 된 중요한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혁신은 동쪽을 향해 엄청난 팽창을 가능케 했다”고 말했다.

비판자들은 이러한 이론은 심각한 난관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비록 유전학을 통해서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는 경로를 통해 인간들이 적어도 55,000년 전에 아시아로 확산했다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가장 오래된 미세석기가 남아시아 지역에서 40,000년경에 발견될 뿐이다. 멜라스는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해안지역의 초기 지역이 물속에 잠겼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미세칼날이 발견되는 지역은 좀더 늦은 시기로 나타난다. 그 이유는 이들 지역이 훨씬 내륙지역이라는 점이다. 멜라스는 “이것은 완전히 다른 환경이다. 사람들은 적응해야 하며 하룻밤 사이에 바뀌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멜라스는 후기에 빠르게 일어난 문화적으로 발달된 사람들의 팽창에 대한 주장을 하고 있지만 페트라글리아는 주레루 계곡의 화산재층 밑을 발굴하고 있으며 매우 다른 시나리오를 그리고 있다. 페트라글리아와 그의 동료들은 이 화산재층 밑에서 간단한 긁는 도구와 석핵을 발굴했으며 그 시기는 약 77,000년에서 74,000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Petraglia, M. et al. 2007). 네안데르탈인이나 다른 고대인류가 이러한 도구를 만들었을 수 있다. 하지만 페트라글리아는 “인도에 네안데르탈인이 있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고 말했다. 대신 이들은 이 출토물들은 현생인류가 도구를 만는 곳인 남아프리카 지역에서 온 것과 유사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페트리글리아에게 그 의미는 확실하다: 현생인류는 토바 화산이 폭발하기 전에 인도로 향한 길을 찾았을 것이다. 훨씬 뒤에 일어난 이주민의 파도가 미세칼날 기술이라고 주장하는 멜라스의 의견에 비해, 페트라글리아는 현생인류의 오랫동안 정착된 인구가 자신들의 새로운 도구를 개발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현생인류의 DNA에서 발견되는 실마리는 아프리카에서 아시아로 이동한 이주자들의 시기가 60,000년 전이라는 가능성을 제외하는 결론을 반대하고 있다. 그는 “이들 유전학자들의 문제는 샘플링의 문제이다. 이들은 현재 살고 있는 현생인류에서 샘플을 얻었다”고 말했다. 초기에 도착한 사람들의 유전적인 신호는 인구가 변화하고 사라지면서 완전히 사라졌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페트라글리아의 이러한 주장은 적어도 한 명의 유전학자에게 흥미를 일으키고 있다. 스티븐 오펜하이머는 mtDNA를 연구했으며 ‘해안 고속도로 모델’에 기여했다 (Macaulay, V. et al. 2005).
그의 관점에 있어서, 이들 현생인류의 이동은 빠르고 해안선을 따라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유전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최근에 일어난 것일 필요는 없다. 기존 주장보다 더 일찍 이동이 이루어졌다는 실마리는 인도에서 이루어진 mtDNA 연구에서 찾을 수 있다. 한 세트의 변이체들은 예상보다 다양하지 않았으며 이것은 인도의 최초의 현생인류가 그 숫자가 완전히 사라질 수 있는 재난을 겪었다는 시나리오를 제공하고 있다. 그 원인은 토바 화산재 구름일 것이며 이것은 이미 현생인류가 인도지역에 토바 화산이 폭발할 무렵에 인도에 정착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추정했다. 그는 또한 아시아에서 토바화산 폭발이전에 현생인류의 존재에 대한 다른 실마리를 찾고 있다.
즉, 필리핀지역에서 발견된 다리뼈와 중국에서 발견된 두개골로 그 기원과 시기를 알 수 없다. 오펜하이머는 DNA는 부정확한 시계라고 지적했다. 그는 L3 일배체형에 대한 가장 가능성있는 시기 (아프리카에서 탈출한 시점)는 토바 화산분출 이후가 될 것이라고 인정했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는 잘못될 수 있다. 가장 최근에 이동한 한계시점은 79,000년전으로 이것은 L3의 시기가 토바분출시기와 겹쳐져 있다는 점이다”고 말했다. 만일 DNA가 이 논쟁을 해결해주지 못한다면 가장 강력한 증거는 고고학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녹색 사막
페트라글리와 그의 지지자들은 과거 2년 동안 많은 증거가 증가하고 있으며 그 이유는 아라비아의 현생인류가 100,000년 전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정적인 증거’는 오만에서 발견되었으며 영국 버밍험 대학 (University of Birmingham)의 제프리 로즈 (Jeffrey Rose)의 연구팀은 현생인류가 오늘날 핸드폰을 잃어버린 것처럼 106,000년 된 석기유물을 발견했다. 확연히 구분되는 삼각형 석핵과 기다란 창촉은 현생인류가 만든 것이며 이러한 종류의 기술은 북부 수단의 누비아 지역에서 처음 발견되었으며 현생인류가 정착했던 지역이었다. 그리고 약 2,000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홍해의 다른 편 지역에서 동일한 석기가 발견된 것이다 (Rose, J. I. et al. 2011). 로즈는 “이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이들은 동일한 그룹의 사람들이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오만에 도달할 즈음에 발달된 우수한 기술의 도움으로 이동한 것이 아니며 기후와 생태계로 인해 이들이 이동하게 된 것이라고 로즈는 말했다. 당시에 아라비아 반도는 습한 사바나 지역으로 많은 사냥감이 있었다. 로즈는 “이 지역은 갑작스럽게 발견된 초록의 지역이었으며 북동부 아프리카의 사람들이 이동하게 되었다. 이들이 이동했을 것이라는 점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 초기 탐험가들이 아라비아에서 이란을 넘어 인도로 이동했을까? 멜라스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팽창에 실패했으며 이스라엘에 기록된 것처럼 현생인류가 이스라엘에 처음 정착한 것은 100,000년 전이며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과 같다. 기후가 낮아지고 건조해지는 75,000년 전에 아라비아 지역은 다시 사막으로 변했으며 누비아인들은 그곳에서 죽거나 아프리카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멜라스는 “이것은 그저 느낌이 아니다. 누비아인들의 기술이 인도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만일 마이크 페트라글리아가 이러한 누비아인의 석핵을 가지고 와서 ‘자 봐라, 인도에서 이것을 발견했다’라고 한다면, 나는 무릎을 꿇고 ‘미안해 마이크, 내가 잘못 생각했어’라고 할 것이다”고 말했다.

비록 이 누비아의 도구를 만드는 사람들이 아시아의 깊숙한 곳으로 이동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다른 고대의 아라비아인들이 아시아로 이동했을 것이라고 페트라글리아와 다른 연구자들은 주장했다. 아랍 에미레이트 (United Arab Emirates)의 제벨 파야 (Jebel Faya)라는 지역에서 영국 런던의 로열 홀로웨이 대학 (Royal Holloway)의 사이먼 아미타지 (Simon Armitage)의 연구팀은 125,000년 전보다 더 오래된 동부 아프리카의 현생인류가 만든 것과 유사한 유물을 발견했다 (Armitage, S. J. et al. 2011).
제벨 파야 지역은 이란을 향해 돌출된 지역으로 이곳의 정착민들은 쉽게 동쪽으로 향할 수 있었을 것이다. 110,000년 전까지 빙하가 북쪽에 형성되고 해수면은 감소되었을 것이다. 그 결과 호르무즈 해협이 좁아지고 쉽게 이란으로 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미타지는 “이것은 매우 가능한 일이며 파야의 사람들은 이동할 수 있었을 것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러한 개연성은 아미타지와 토바화산 이전모델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주장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것이 될 것이다. 만일 일군의 개척자들이 아라비아 지역을 방황하다가 마지막 간빙기 시기에 녹색의 아시아지역으로 움직였다면 이들이 움직인 경로는 희미할 것이다. 주레루 계곡의 토바화산 이전의 유물은 아라비아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제벨 파야의 유물을 연구한 텍사스의 서든 감리교 대학 (Southern Methodist University)의 앤소니 마크스 (Anthony Marks)는 주장했다. 그리고 주레루 계곡의 가장 오래된 유물을 분석하고 현생인류의 작품이라는 주장을 지지해온 고고학자는 이제 더 이상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페트라글리아의 협력연구자였던 호주 브리스번의 퀸즈랜드 대학 (University of Qeensland)의 크리스 클락슨 (Chris Clarkson)은 이것은 확인되지 않은 고대인류의 작품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클락슨과 다른 연구자들은 우리의 선조들이 인도에 도착하여 74,000년 전에 화산재가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았을 것이라는 주장을 확신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말했다. 토바화산 이전 또는 이후에 대한 논쟁에서 두 가지 시나리오는 모두 희박하고 추상적인 유물에 의존하고 있다. 마크스는 “사람들은 말하지 않는 돌도 말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돌은 말하지 않는다.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다. 우리가 우리의 관점을 이 돌에 덮어 씌우는 것이다”고 말했다. 현재 필요한 점은 고고학자들에게 항상 필요한 것이다: 즉, 좀더 나은 증거이다.
페트라글리아는 “우리는 그저 빙산의 일각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찾을 수 있는 몇 개 지역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아라비아 반도, 인도양 해안가 그리고 인도의 심장부에서 고고학자들은 계속 유물을 찾고 있다. 토바화산 이전에 현생인류가 만든 유물을 찾을 지도 또는 훨씬 후기에 식민자들이 해안가에 머물면서 버린 미세칼날을 찾을 지도 모른다. 또는 가장 확실한 것은 토바 화산층 밑에 존재하는 두개골로 현생인류의 모습을 하고 있거나 그 자리를 우리의 고대인류에게 양도해야 할 것이다.
(KISTI 미리안 글로벌동향브리핑)


출처: ‘네이처’ 2012년 5월 3일 (Nature 485, 24?26 (03 May 2012) doi:10.1038/485024a)


원문참조:
Oppenheimer, C. Eruptions that Shook the World (Cambridge Univ. Press, 2011).
Soares, P. et al. Mol. Biol. Evol. 29, 915?927 (2012).
Mellars, P. Science 313, 796?800 (2006).
Petraglia, M. et al. Science 317, 114?116 (2007).
Macaulay, V. et al. Science 308, 1034?1036 (2005).
Rose, J. I. et al. PLoS onE 6, e28239 (2011).
Armitage, S. J. et al. Science 331, 453?456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