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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 뉴스

청동기시대의 전쟁

by 한국고고학콘텐츠연구원(플라스캠프) 2016. 5. 2.

 

 

1996년 독일 북동부 톨렌제강에서 한 아마추어 고고학자가 발견한 위팔뼈로 위쪽에 돌화살촉이 박혀있다. 추가 발굴 결과 약 3200년 전 이곳에서 병사 수천 명이 뒤엉킨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음이 밝혀졌다. -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 역사보존과(MVDHP)/S. Suhr 제공

‘톨렌제 계곡’으로 명명된 유적지가 속한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의 역사보존과와 그라이프스발트대의 고고학자들이 2009년에서 2015년까지 진행한 본격적인 발굴 결과 불과 450평방미터 면적에서 최소한 130명의 유골이 나왔고 말도 다섯 마리나 됐다. 그런데 발굴 면적은 기껏해야 전체의 10%에 불과하기 때문에 고고학자들은 최소한 750명은 될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130명은 거의 젊은 남성인 것으로 밝혀졌다. 또 앞의 위팔뼈처럼 무기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뼈가 상당수 있었고 청동으로 만든 갑옷과 투구도 나왔다. 불과 방 하나 면적인 12평방미터에서 두개골 20개를 포함해 뼈 1478개를 수거하기도 했다.
이를 재구성해보면 직업군인을 포함한 수천 명의 군인들이 강변에서 전투를 벌여 수백 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3200년 전 이 지역에는 도시는 물론이고 웬만한 규모의 마을이 있었다는 흔적도 없다는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당시 인구밀도를 1평방킬로미터에 5명 미만으로 추정했다. 물론 전투에 대한 기록도 없다. 따라서 이런 곳에서조차 이 정도 규모의 전쟁이 벌어졌다면 당시 인구가 많았던 근동과 북아프리카, 지중해 지역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참고로 청동기시대는 약 5000여 년 전 근동에서 시작됐다.

 

지금까지 전체 유적지의 10%인 450평방미터가 발굴됐는데 최소 130명의 유골이 나왔다. 사진은 이 가운데 12평방미터 구역으로 두개골 20개를 포함해 뼈 1428개가 출토됐다. - MVDHP/C. Hartl-Reiter 제공
지금까지 전체 유적지의 10%인 450평방미터가 발굴됐는데 최소 130명의 유골이 나왔다. 사진은 이 가운데 12평방미터 구역으로 두개골 20개를 포함해 뼈 1428개가 출토됐다. - MVDHP/C. Hartl-Reiter 제공 
 

갑옷은 직업군인 존재 증거


톨렌제 계곡 유적은 청동기시대 전투현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일뿐 아니라 무기와 병사가 함께 발굴된 가장 오래된 전장 유적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비교할 대상이 없을 정도라고. 죽은 병사와 버려진 무기들이 강변 습지대에 묻히면서 잘 보존됐기 때문이다. 반면 당시 이집트나 그리스 지역의 문헌은 많이 남아있고 그 가운데는 전쟁에 대한 기록도 있지만 이를 입증할 유물이 전혀 없는 상태다. 예를 들어 기원전 8세기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는 톨렌제 계곡 전투가 일어나고 약 100년 뒤에 벌어진 트로이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증거가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작품에 묘사된 전투장면을 후세의 창작으로 여겼다.


기사에서 독일고고학연구소 스벤트 한센 박사는 “오랫동안 우린 선사시대에 전투가 벌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며 “무덤에서 출토된 부장품들은 신분을 상징하는 귀중품이나 권력의 상징으로 설명했지 실제 무기라고 보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선사시대 사람들은 수십 명이 습격을 하는 수준의 싸움이나 분쟁은 벌였겠지만 직업군인이 동원된 수천 명 규모의 전투를 벌였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직업군인 또는 고도로 훈련된 군인이 있었다는 가장 큰 증거는 갑옷과 투구의 존재다. 상대의 공격에서 몸을 보호하기 위한 장비이지만 군사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이 입을 경우 오히려 화를 자초한다.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군장을 하고 전투에 임했다는 건 많은 훈련을 소화했다는 뜻이다. 또 말의 존재는 기병이 있었다는 의미이고 일부 유골 주변에서 주석 반지나 청동 장식술, 청동 팔찌 등이 함께 출토돼 신분이 높은 사람들도 있었음을 추정케 했다. 즉 당시 지배층이나 직업군인이 말에 올라 장교의 역할을 하며 전투를 지휘했음을 시사한다.


한편 뼈의 상처를 면밀히 조사한 결과 아문 흔적이 전혀 없어 사람들이 불과 하루 이틀 사이에 벌어진 전투로 죽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만큼 전투가 치열했다는 뜻이다. 반면 사망자의 27%에서 오래 된 상처의 흔적이 보였다. 즉 이들이 오래 전부터 전투를 해온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당시 무기들의 파괴력을 잘 보여주는 유골로 위는 떡메처럼 생긴 목재 무기에 맞아 구멍이 뚫린 두개골이고 아래는 청동화살촉이 박힌 두개골이다. 안쪽에서 찍은 사진으로 화살촉이 두개골을 뚫고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 위 MVDHP/D. Jantzen; 아래 톨렌제계곡연구프로젝트/V. Minkus 제공  

한편 치아의 DNA를 분석해 어린 시절 먹었던 음식을 재구성한 결과 전투원 가운데 현지인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많은 사람들은 수수가 풍부한 음식을 먹었던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는 당시 주로 남유럽에서 재배되던 곡물이다. 즉 유럽 곳곳에서 병사들이 집결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도 별로 살지 않는 북유럽 오지에서 이런 대규모 전투가 벌어진 것일까. 발굴 과정에서 나무와 돌로 만든 다리의 흔적이 나왔는데, 아마도 이 지역이 교통의 요지였던 것 같다. 즉 두 부족이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전투를 준비했고 이 과정에서 유럽 각지의 용병을 고용했을지도 모른다는 시나리오다. 톨렌제 계곡 유적은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인류가 조직적으로 대규모의 전투를 수행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동아사이언스 [강석기의 과학카페 270] 3200년 전 청동기시대 전쟁터 발굴 이야기